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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맛

제7의봉인 고전영화추천 잉그마르베르히만

by 비마셀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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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자군 전쟁 중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죽음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이 되었다. 십자군 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제7의 봉인(The Seventh Seal) 속 사회는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으며, 사람들은 종말을 예견하고 삶의 희망을 잃어버렸다. 삶의 두려움은 비종교인이나 종교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속되는 신의 침묵에 오히려 종교인들이 더 불안에 떨었을지도 모른다. 제7의 봉인은 십자군 전쟁 이후 신의 존재에 회의감을 품은 한 기사의 내면 심리를 아주 잘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한 고뇌는 우리에게 종교와 죽음이라는 문제를 깊게 성찰하게 한다. 종교는 인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만든 허상인 것인가?


-죽음에 대한 고찰-

죽음은 삶의 일부로서 존재한다. 죽음은 삶과 멀리 떨어져서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자리에 존재하며 불현듯 들이닥친다. 안토니우스 블로크(Antonius Block)는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기사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 후 고향에 돌아와 죽음(Death)과 마주한다. 그는 당황하거나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죽음과 대면한다. 그 자신도 죽음이 삶과 함께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죽음의 하얀 얼굴빛과 까만 외투의 색은 흡사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어둠과 창조의 빛이 공존하는 듯 보인다. 이러한 색상 대비는 체스에서도 이루어진다. 창조의 하얀색, 어둠의 검은색을 삶과 죽음으로 본다면 삶과 죽음은 함께 한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죽음은 안토니우스에게 “이미 오래전부터 네 곁에 있었다” , “난 연기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은 하나이고 죽음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은 완벽한 신에게 의지하며 정서적 안정을 추구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봤을 때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다는 것은 바람직한 것일까? 안토니우스 블로크는 이러한 지성을 바탕으로 신의 존재에 회의감을 품는다.


-체스 게임과 침묵- 


체스 게임과 침묵의 공통점은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계속된다는 것이다.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체스 게임과 신의 침묵은 계속된다. 체스 게임은 영화에서 총 세 번에 걸쳐 나오는데, 해변에서의 체스 게임이 그 시발점이다. 안토니우스는 죽음을 앞에 두고 체스 게임을 제안한다. 이는 안토니우스가 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을 품은 채 죽을 수 없다는 자유의지에서 구현된다. 해변에서의 체스 게임 후 그는 교회에서 고해성사를 한다. 자신이 육신은 언젠가 소멸될 것을 알고 있지만 사후세계, 즉 신의 존재에 강한 회의를 느낀다. 무조건 적인 믿음과 막연한 약속들 속에서 신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전쟁에서 패배하고, 흑사병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지만 절대자의 구원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게다가 고해성사를 듣는 것마저 신부가 아니라 죽음이었다. 해변에서 체스 게임은 죽음을 조금이라도 지연시켜서 신에 존재에 대한 확답을 얻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이었다. 신이 존재한다면 그 어떤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겠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신의 침묵으로 열렬한 믿음은 점점 신에 대한 불신으로 치달았다. 

체스 게임이 이어지기 전에 안토니우스는 Jof와 그의 아내 Mia 광대 부부를 만난다. 광대 부부는 딸기와 우유를 주변 사람들에게 대접한다. 안토니우스는 신선한 우유를 맛보고, Jof의 음악을 듣고 따뜻한 풍경을 보며 잠시나마 평화로움과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신앙에서 얻지 못했던 내면의 안정과 평화를 찰나의 세속적인 삶을 통해서 느낀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이어지는 풀 밭 위 체스에서 미소를 지으며 게임에 임한다. 이를 통해 종교와 죽음에 관한 문제는 잠시 있고 현재에 충실하며 여유를 갖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이어지는 체스 게임 전에 일행과 함께 음산한 숲속을 통과한다. 그곳에서 악마와 함께 지낸다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눈을 들여다보면 악마가 보인다고 하지만 안토니우스는 그녀의 눈에서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여인을 잡아 처형장으로 끌고 온 장본인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죽음과 종교에 대해 어떤 질문도 응답받을 수 없다는 것을 또다시 깨닫게 된다. 마지막 체스 게임에서 안토니우스는 체스 게임의 핵심인 여왕을 빼앗긴다. 여왕은 체스에서 정신이자,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자를 뜻한다. 이것은 여왕을 빼앗김으로써 더 이상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한다.  그는 패배에 가까워지자 자신의 체스 판을 엎는다. 그러나 죽음은 위치를 다 기억하며 원래 자리로 되돌린다.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죽음을 지연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은 다음의 만남이 그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말을 남긴다. 자신의 아내인 카린(Karin)이 기다리고 있는 성에 도착한 일행은 죽음과 마주한다. 안토니우스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지만 마지막까지 신은 침묵한다.


-죽음에서 벗어난 광대 요프-


광대 부부의 생존은 시대상을 조명한다.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요프는 숲속에서 안토니우스와 체스를 두는 죽음을 보고 일행에서 도망친다. 모두가 죽음과 마주했을 때 요프는 살아남아 죽음과 주인공 일행의 춤사위를 본다. 광대 요프의 생존은 시대상을 통해 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십자군 전쟁 이후 교황의 권위는 쇠퇴하고 왕권이 강화되며 기사의 지위와 기독교의 권위는 몰락한다. 또한 상공업이 발달하여 물질적 가치가 종교적 가치보다 우위를 점하게 된다. 요프 부부는 안토니우스와 달리 물질적 가치를 중요시한다. 그러나 물질적인 욕구가 탐욕스럽게 비추어 지진 않는다. 미아는 요프가 가져온 작은 선물에도 매우 만족하며 즐거워한다. 광대 부부는 미천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부조리함을 고발하지 않으며 그들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특히 그들의 아이는 부부에게 큰 행복을 선물해 준다. 광대 부부가 살아남은 진짜 이유는 십자군 전쟁 이후 종교적 권위가 쇠퇴함에 따라 물질적인 가치도 중요하다고 여긴 시대상뿐만 아니라 넘치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안토니우스는 죽음에게 고해를 할 때 자신은 텅 비어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광대 부부는 자식에 대한 사랑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의 풍요로움을 안고 산다. 

 

-결론-

결론적으로 종교는 마음의 문제라고 본다. 신은 아무리 외치고 소리쳐도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으로 일관한다. 이성적으로 사고했을 때 보이지도 응답하지도 않는 신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 마음속의 신, 개개인의 신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것이 친구이건 선배이건 부모이건 선생님이건 상관없다. 우리는 마음속 신을 통해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힘을 얻고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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